- PREVIOUS이전작품이 없습니다.
- NEXT피의 용병 루시어드
본문
등장인물
오말순(오두리)
여자, 73세, 전 종로 국밥집 주인, 건축 년도 1882년짜리 집 주인. 오직 가족만 보며 희생해 온 말순이 우연히 엮이게 된 택시 기사와 사진사로 인해, 20대 젊은 모습으로 회춘하게 된다. 젊어진 자신의 모습을 마주한 말순은 2회차 인생을 받아들이고, 빼앗긴 꿈인 가수를 이루기 위해 유니스 엔터테인먼트의 연습생 오두...더보기
수상한 그녀 ; 어느 아이돌 연습생의 수상한 사생활
1화 - 인생사 새옹지마
비가 내리는 서울의 밤은 평소랑 달랐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와 그에 일렁이는 건물의 불빛들이 있었다. 회색빛 구름과 쉼 없이 퍼붓는 비는 가로등이 평소보다 흐릿하게 거리를 비추었다. 폭우주의보가 내려져 평소랑은 다르게 거리에 보이지 않는 사람들. 그랬다. 오늘따라 서울의 밤은 어두웠다.
그 어두운 거리를 배경 삼아 한강 다리를 걸어가는 할머니가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오말순. 말순은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그저 멍하니 비를 오롯이 맞고 있었다. 말순의 주름진 얼굴로 빗물이 흘렀고, 파마기 있는 머리카락은 물먹은 미역처럼 얼굴에 달라붙어 있었다.
말순의 초점 잃은 시야 끝에, 서울의 건물들이 있었다. 키재기를 하듯 치솟은 빌딩들과 화려하고 웅장한 건물들이었다. 그것을 빛내는 불빛들도. 그 건물들을 바라보면서, 말순은 중얼거렸다.
“저런 화려한 빌딩까지는 아니더라도, 서울에 있는 전세 주택 정도라고는 생각했는데….”
말순은 가만히 멈춰 서서 73년의 인생을 곱씹었다. 73년. 정말이지, 여러 희로애락이 있었던 세월이었다. 가족을 위해서라면 안 해본 일이 없었고, 말순의 청춘과 꿈마저 포기했다. 그 꿈을 붙잡고 살았다면, 지금쯤 어쩌면 더 행복했을 수도, 더 성공했을 수도, 때늦은 미련이 안 생겼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땐 방법이 그것뿐이었다.
아비 없이 자란 하나뿐인 딸, 지숙을 잘 키워서 명문대에 보내고, 대기업에 취직시켰다. 지숙은 말순과 다르게, 괜찮은 남편감을 얻어 결혼했다. 지숙의 남편인 민석은 같은 명문대를 나와, 제약회사 영업직을 다니다 그만두고, 여러 사업을 하며 말아먹긴 했지만, 성격만큼은 좋았다. 말순이나 지숙처럼 지랄 맞거나 고집이 세지 않았다. 특히, 누구보다 서로를 아끼는 것이 보이는 좋은 부부였다.
그런 지숙이네 부부에게 찾아온 딸자식도 귀여웠다. 그래서 지숙을 키우면서 미처 해주지 못했던 것을 손녀인 하나에게 해줬다. 그랬기에, 잘나게 사는 건 아니지만, 남들처럼은 산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따로 살았으면, 적어도 오늘 같은 일은 없었겠지. 너무 오래 살긴 했어요, 우리.’
지숙의 그 말이, 말순의 73년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고, 깨트리고, 허무하게 만들었다. 말 그대로 인생사 새옹지마. 이 정도면 되었다고, 좋다고, 괜찮다고, 생각했던 모든 일이 한순간에 어그러져 사라졌다.
말순은 파도처럼 몰려드는 기억과 감정의 범람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감긴 눈꺼풀에 그녀의 슬픔을 대변하듯 빗방울이 맺히다가 떨어졌다.
말순은 허망함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쓸데없이, 쓸데없이. 너무 오래 살았어….”
말순은 다시 감았던 눈을 떴다. 그녀의 시야는 빗물인지, 눈물인지 알 수 없는 것에 모든 것이 흐릿하고 일그러져 보였다. 그것은 마치, 말순의 인생 같았다. 쓸데없이 오래 살아 모든 것이 흐릿해져 버린, 이젠 젊음과 청춘도 없어서 다시 바로잡거나 시작할 수 없는 상태.
그때 말순의 눈에 보이는, 일렁이는 것이 있었다. 바로, 흐릿한 불빛을 집어삼킬 듯한 어두운 한강이었다.
한강에 떨어지는 빗물, 어둑한 한강에 반사된 빛의 산란을 보며, 말순은 그 장면에서 시선을 돌릴 수 없었다. 그녀의 공허함과 닮았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인지는 말순, 본인만 알 것이다.
말순이 그리 쓸쓸히 한강을 보고 있을 때였다.
빵-!
말순의 생각을 끊어내듯 차의 경적이 들렸다. 그 소리에, 말순은 무의식적으로 차도로 얼굴을 돌렸다.
그곳에는 개인택시 한 대가 있었다. 조수석의 창이 반쯤 열려있고, 택시 기사가 말순을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보고 있었다.
“할머니, 어디 가세요?”
말순은 두어 번 눈을 깜박이다가 외면한 채, 다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목적지 없이 정처 없이 떠도는 망령 같았다.
택시 기사는 말순이 어쩌면 잘못된 선택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해, 그녀를 조용히 따라붙으며 말을 걸었다.
“오늘 같은 날, 비 맞으면 골병들어요. 모셔다드릴게. 어서 타요.”
말순의 힘없는 말이 비에 묻힐 듯 택시 기사의 귀에 꽂혔다.
“젊은 양반이 보기보다 고집 있네. 가요.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말순의 거절에도 택시 기사는 계속 말을 걸며, 그녀의 속도에 맞춰서 차를 운전했다.
“제가 아는 분과 닮아서 그래요. 그러지 말고 타세요.”
빵-! 빵-!
택시의 뒤로 다른 차가 경적을 울리더니, 기어이 택시 기사를 욕하기 시작했다.
“굼벵이 새끼야?! 빨리 못 가!”
말순은 자신으로 인해, 애꿎은 욕을 먹는 택시 기사에 대한 미안함과 점점 거세지는 빗줄기로 망설여졌다. 처음에는 신경도 안 쓰이던 비가, 택시 기사의 걱정 어린 말에 꽤 아프고, 축축하고, 춥다는 것을 자각하게 되었다. 말순은 한숨을 푹 쉬더니, 그제야 택시에 올라탔다.
“미안하네. 젊은 양반이 나 때문에….”
“아니에요. 그냥 제가 성격상 할머니, 할아버지분들을 보고 못 지나가서요.”
“요즘 사람답지 않게 예의가 바르네….”
“하하하, 그런가요?”
택시 기사는 말순의 칭찬에 어색하게 웃으며, 미터기 대신 라디오를 켰다. 라디오가 빗소리와 제법 어울렸다.
“어디로 모셔다드릴까요?”
그 물음에, 말순은 창문에 기대어 창밖을 보았다.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모든 것이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흐릿하게 보였다. 말순은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몰라, 그냥… 잠깐 비 좀 피합시다.”
말순의 막막하면서도 허탈한 말에, 택시 기사는 말없이 라디오의 볼륨을 올렸다. 때마침, 라디오에서는 사연이 나오고 있었다.
“다음 사연을 읽기 전에 노래 한 곡 듣고 오겠습니다. 노래는 김애심 선생님의 노란 스카프 그 사람.”
말순은 라디오 디제이의 말과 함께 들리는 전주에 살짝 움찔거리더니, 다시 멍하니 창문을 보았다.
번쩍! 우르르 쾅!
번개가 번쩍인 후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택시 기사는 백미러를 힐끔 쳐다보며, 혼잣말했다.
“날씨가 오늘 심상치 않네요.”
음악이 점점 하이라이트로 갈수록 말순은 침울해졌다. 그렇게 말순이 차창에 기댄 채, 도시의 풍경을 눈에 담고 있을 때, 차량의 오디오에서 하얀 연기가 흘러나왔다. 연기가 차량을 거의 다 덮고 나서야, 상황이 이상하단 걸 눈치챈 말순이 당황한 기색으로 말했다.
“이봐요, 기사 양반….”
하지만 말순의 정신은 점차 몽롱해져, 잠기운이 몰려왔다. 이내, 말순은 수마에 빠졌다.
***
찰칵!
어디선가 들리는 플래시 소리와 함께, 말순은 눈을 떴다. 그녀의 시선에 들어온 그곳은, 어느 사진관이었다.
“여기가 어디여…?”
말순은 벽에 걸린 사진들을 둘러보았다. 사진관은 특이한 곳이었다. 한쪽에는 노인들의 사진이 있었고, 다른 쪽에는 젊은이들의 사진이 있었다.
그중에는 영정사진들도 있었다. 말순은 그 영정사진들을 천천히 보았다.
영정사진. 말순도 곧 준비해야 할 때기는 했다. 이젠 몸 여기저기가 쑤시듯 아팠고, 머리는 하얗게 새어갔으며, 노인 만성질환도 몇 개 있었고, 장기들도 젊을 때처럼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기계로 치면 녹슬고 오래되어, 삐걱삐걱 움직이는 것 같았다.
말순의 나이가 죽음과 가깝긴 했다. 말순은 씁쓸함과 허무함을 느끼며, 지금 그녀가 왜 사진관에 있는지 그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